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문단 편집) == 수습 및 후속 조치 == [[파일:attachment/burma04.jpg|width=600]] 대한민국 국적인 17명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고위공무원]]들이었고 [[유해]]는 [[엠버밍]] 과정을 거쳐 비행기로 운구됐다. 외국에서 사망한 사람의 유해를 한국으로 송환하여 장사지내는 방안은 대체로 시신을 [[엠버밍]] 처리·보존하여 비행기로 운구한 뒤 한국에 매장하는 방법과[* 참고로 최근 들어 화장 없이 엠버밍 과정을 통해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해 매장된 사람으로는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있다. 이전에는 [[미국]] [[호놀룰루]]에서 서거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국]] [[상하이]]에서 사망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사례가 있다.] 외국 현지에서 화장한 뒤 비행기로 운구하여 국내에 봉안하는 방법[* 40년 후 전 개그맨 [[서세원]]이 [[캄보디아]]에서 사망했을 때 현지에서 화장한 후에 한국까지 비행기로 운구하였다. 캄보디아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냉동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40년 전 버마에서도 가능했던 냉동보관 및 엠버밍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서 씨가 현지에서 사업을 실패해 형편이 나빴다지만 [[서정희]], [[서동주]] 등 한국의 유족과 방송가 동료들이 십시일반 모아 운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화장 결정은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이후 [[디스패치]], [[MBC]] [[실화탐사대]], [[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 여러 언론이 서 씨의 [[프로포폴]] 무단 투약 의혹과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 센]] [[총리]] 일가와의 유착 의혹을 제기하자 “서 씨의 화장은 그의 시신이 한국에서 부검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결정”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당연히 전자가 훨씬 비싸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공무원 신분이었고 공무 출장 중 순직한 희생자라는 점을 감안해 [[국민장]]을 결정하였으므로 엠버밍 과정 등 장례 절차 전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하였다. 사건 이후 10월 9일부터 먼저 희생자들의 자택에 빈소가 차려졌으며 다음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도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11일 유해 도착 당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영현봉영식을 연 뒤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에 설치된 합동영현봉안소에 안치됐다. 영결식 전까지 전두환 대통령과 각계 인사, 시민들이 조문 및 분향을 했으며 같은 달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순국외교사절 합동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버마 랑군에는 2개의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2명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만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했다. 수술실에 에어컨도 없어서 부채를 부쳐 가며 수술했다. 그 결과 환자들의 염증이 심해져서 2차 수술을 할 때쯤에는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본격적인 치료는 테러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양곤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들이 총동원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조지 P. 슐츠|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자를 살리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기백 합참의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은 필리핀 [[클라크 국제공항|클라크 미국 공군기지]]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다만 귀국하러 공항에 가던 와중에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들이 안치된 병원에 들려 조의를 표하고 미얀마 제1육군병원에 들러 생존자들의 병실을 둘러보았다. 병상에 누운 공보비서 최재욱은 얼굴이 피투성이어서 대통령이 몰라봐 "제가 최재욱입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알아볼 정도로 상황은 참혹하였다. 한편 북한 공작원들은 정찰국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불리는 '강창수 부대'[* 부대장인 강창수 소장은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총참마장으로 안동에서 사살된 [[강건]]의 아들이다.]의 3인조로 김진수 소좌(일명 진 [[某]]), 강민철 대위(본명 강영철), 신기철 대위(본명 김치오)였다. 이들은 9월 17일에 5379톤의 북한 화물선 '애국 동건호'[* '동건 애국호'라는 말도 있음. 재일동포 '문동건'이 북한에 기증한 화물선이며 1982년 8월 22일 가봉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암살 작전에도 이 배가 쓰였다. 다만 가봉 대통령궁에서 폭탄을 터트릴 미친 계획이라 뒷수습이 안 될 것 같아 하루 전날 작전이 취소되었다. 이때 작전에 협조했다가 탈북한 3등 서기관이 [[고영환]]이며 당시 가봉까지 침투한 북한 공작원 2명 중 한명이 아웅산 사건 이후 체포된 공작원이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를 타고 랑군 부두에 왔다가 조용히 북한 대사관으로 숨어 들어 갔었다. 그리고 테러 3일 전인 10월 6일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고 천장에 [[클레이모어]] 2개와 소이탄 1개를 매달았다.[* 클레이모어 1개는 불발하여 버마 측이 회수해 갔다. 대체 무슨 일인지 북한의 특수공작 때 쓰이는 장비를 보면 정상 작동을 안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 이후 3일간 근처에서 노숙하다가 묘소에서 1km 떨어진 영화관에서 원격조종장치를 눌렀다. 작전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공작원들은 배를 타러 양곤강으로 가야 했는데 여기서 흩어지기로 하여 조장인 김진수는 수영해서 가기로 했고 강민철과 신기철은 걸어갔다.[[https://youtu.be/J2m0aJJ1GUk|요약]] 그런데 양곤강에 도착하니 북한 화물선이 없었다. 이는 이집트에 갔다 온 애국 동건호가 10월 6일 재입항을 신청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 미얀마측에서 10월 15일까지 입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김진수는 새벽 2시에 홀로 양곤 강을 헤엄치고 있었는데 새벽에 수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지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포위당했다.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 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 강민철과 신기철은 양곤 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뱃사공 2명에게 돈을 주고 배에 승선했는데 원래 타고 있던 주민 2명 중 한 명이 배가 너무 아프다며 복통을 호소하고 배에서 내려서 풀 숲으로 갔다. 이후 복통을 호소했던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역시 포위당해서 강민철과 신기철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신기철은 사살되었고 강민철은 도주했으나 얼마 못 가서 또 포위당했다. 그러자 강민철도 김진수처럼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마찬가지로 수류탄이 터져 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김진수와 강민철이 입은 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둘 다 수류탄을 쥔 쪽 손이 파괴되어 외팔이가 된 것이며 이 중 김진수는 눈에 파편이 박혀 [[애꾸눈]]이 되었다. 던지려던 수류탄 2발이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살인멸구]]를 위해 '''안전핀을 뽑으면 수류탄이 바로 터지도록''' 손을 써 놓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당시의 공업 수준이 수류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진수는 폭발로 인해 팔 하나와 눈 한쪽을 잃은 데다 남은 한쪽 눈의 시력까지 고작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수준으로 손상돼 사실상 맹인이 되었고 [[진술거부권|계속 진술을 거부하다가(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처형되었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3번째 사형으로, 앞서 2번은 쿠테타에 연루된 반역자들이었다.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다음해 2월 24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강민철은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처음에는 불교로 개종했지만 영치금을 지원해주는 동료 죄수를 따라 기독교로 또 개종했다는 말도 있다. [[기불릭]]?] 북한의 암살 위협에 괴로워하다가 2008년 5월 18일 갑작스러운 간암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당시 테러범 검거를 담당했던 미얀마 경찰은 33년 뒤인 2016년에 미얀마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김진수가 아웅산 묘소 테러범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검거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6393|아웅산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